블로그 이전합니다.



예전부터 옮길 생각을 자주 했었는데 옮기는 것도 좀 구차하게 느껴져 그냥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정이 깊게 들었던 탓도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한 방향성 없이, 사적인 이야기를 적는 블로그 치고는 좀 오래 사용했죠.
슬슬 바꿀 때가 됐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마침 이번 스킨 2.0 사건 덕분에 마음을 굳혔습니다.
개인적으로 이글루스엔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오히려 빠르게 수정해줘서 감사한 마음까지 듭니다.


초기에 알던 지인들 중에 블로그 접으신 분들이 대부분이시고,
지금은 오시는 분 적은 그런 블로그입니다.
남들과의 소통 보다는 저의 이야기를 쏟아낸 듯한, 그런 배려 없는 블로그였습니다.
덕분에 지금 이전하는 마음도 가볍습니다.  아쉽게 여기실 분이 거의 없을 거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이런 개인적인 글을 읽어주시고, 찾아와주시고, 댓글 달아주시고, 관심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찾아와주셨던 분들께는 개별적으로 새 주소를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끔 찾아오시지만그래도 새 블로그 주소 정도는 알고 싶다’ 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면 개별적으로 주소를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새 블로그에서는 더욱 개인적인 이야기만 적게 될 것 같습니다.
저의 개떡 같은 성격도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 되기를 기대하고 있답니다-_-; 쌓인 건 글로 풀어야죠. 암요.

 


늘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적은 것이긴 하지만, 저의 ‘죄악’ 의 증거는 몇 개 남겨두고 갑니다.

* 글 정리하면서 느낀 건데, 카오리 좋아하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다르더군요. 물론 지금도 유치하지만, 그 전은 차마 봐줄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녀는 제게 전환점인가 봅니다. 또 한 번 사랑에 무너지면 그때는 좀 철들까요?
그런 무너짐은 다시 겪고 싶지 않지만요. 후후후후;;; 불안해. 불안해.


* 밀린 공부는 어찌해야 할까요!? ‘밀린 공부’ 란 단어가 앞으로 꽤 오랫동안 제게 입버릇이 될 것 같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초조함은 만성이 되어갑니다. 제게는‘꾸준함’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것을 채울 수 있는가, 없는가가 제 삶의 화두가 되겠네요.
그럼 이만.




 

by 빗소리 | 2009/07/09 04:02 | 트랙백 | 덧글(4)
Sony MDR - EX 500



 





거짓으로 가득한 생애를 보냈습니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진실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니 자신이 했던 거짓된 표현에 대해 통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축복과 저주가 함께 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서술에 '언어'만큼 어울리는 것이 있을까요?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 시도에서 발생하는 희망만큼이나 절망적입니다.
근사치라도 표현할 수 있어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때로 결코 본질에 다다를 수 없다는 현실에서 오는 공허, 소외감, 그리고 좌절에 참담함을 금치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말해 이것은 불가능을 향한 충동에서 오는, 그 욕구 충족의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은 아니지요. 사람은 언어와 규율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아는 인식 속에서 피어나는 균열에서 발생하며,‘실재’ 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하기에, 이것을 부정하는 행위는 유아적 자기기만에 해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절망은 그럼에도 언어로 사유하며 무언가를 서술해야 한다는 것에서 옵니다. 무언가에 대한 표현 자체가 거짓으로 느껴지는 결벽증이 이따금 찾아오는 것입니다. 언어 행위 자체가 원죄처럼 느껴지고, 그 강제적 구속이 저를 끌어내려 이윽고 침묵의 권위에 아래 그 위대함을 인정하게끔 합니다.
아아, 침묵의 미덕은 거짓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성이 경박한 저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끼며 자중해야 할진데도 가볍게 잊고는, 또다시 궤휼한 말재간으로 죄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제게 혐오감을 느끼며 좌절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특별히 결벽증 때문이 아니라도 제가 쓰는 표현의 방식은 분명 심히 과장되어 있었습니다.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낯 뜨거움에, 그 저열한 언어 배열에서 오는 자괴감으로 인해 몸이 덜덜 떨려 당장이라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가득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도피 이상은 되지 않겠지요. 자신의 과오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그나마 자신에 대한 혐오를 미약하게나마 걷어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죄에 대한 무지, 혹은 망각이야 말로 인간 타락의 의심할 바 없는 정석임에, 그럼으로 기억과 기록의 끝자락을 붙들어 자학의 길로 접어드는 것은 어쩌면 이 이상 타락하고 싶지 않다는 최후의, 그러나 천박한 몸부림이라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밑은 그야말로 자기혐오의 나락(奈落). 인간은 주체에 대한 경멸이 수용할 수 있는 한도를 넘어가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경멸이 단순한 종으로서의 인간 혐오나 개체로서의 주체의 혐오가 아닌, 도덕률에 입각한 자기애의 뒤틀린 발현이라 할지라도 결과는 다르지 않습니다.  자의식을 무(無)로 되돌리는 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박하다 하여도 그 절실함에 정상참작의 여지를 부여할 수 있지는 않을까요? 살기 위한 몸부림이 완전한 면죄부가 되어주지는 못해도 그 몸부림이 원죄에 대한 자각과 함께 한다면, 수치스러운 삶에 대한 회개적 영위라는 처벌로……. 그 정도용서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찾아와주시는 분 적은 마이너한 블로그에 올린 글에 두 분이 EX 90을 구입하셨습니다. 그 당시 주기적으로 방문해주시는 분들의 비율로 대략 추측하자면 2 분의 5 정도 되겠지요.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EX 90은 확실히 좋은 이어폰 입니다. 하지만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이어폰이기도 합니다. 특히 청음도 해보지 않고 구입하기엔 하프 커널이라는 리스크가 그다지 적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제 졸렬한 말재간에 무려 두 분이나 EX 90을 구입하셨던 것입니다.
죄책감과 더불어 저의 절제하지 못하는 표현력과 무분별하고 방자한 문체에 속에서 쓴물이 올라오는 것 같은 매스꺼움이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도대체가 제가 그토록 싫어하는 신 표현주의와 다를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차라리‘EX 90 쓰고 있는데, 이거 괜찮네요.’ 식의 한줄 감상이 보다 솔직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 광범위한 추상적 표현과 압축성이야말로 제게 결여됐던, 또한 제가 추구해야하는 부분은 아니었을까요?

그럼에도 또다시 저는 이렇게 구구절절이 말을 늘여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번 만큼은 저의 말이 진정 실재에 가까운 진실성은 없더라도 진실 되듯 전달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침묵의 위대함은 제가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저 높은 곳에 오롯이 존재하기에 바라볼 수조차 없습니다. 그저 절제의 미덕이나마 제 손 가까이 닿기를 간절하게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작은 이렇습니다.
즐겨 사용하던 EX 90이 부셔졌습니다. 보다 정확히는 단선이 됐습니다.
애지중지 사용하던 것은 아니었기에 이건 전적으로 저의 불찰입니다. 그래도 EX 90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똑같은 것을 구입하고자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갔습니다. 호주에서 이어폰을 사는 것은 미친 짓이기 때문입니다. 가격이 두 배 이상 차이나거든요. EX 90은 나온 지가 꽤 됐기 때문에 가격이 조금 다운된 듯 했습니다. 그런데 밑에, 본적 없던 물건들이‘관련 검색’ 이라는 간악한 상술 하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됐던 것입니다.
미묘하게 작은‘관련 검색’ 이미지의 크기가 저의 시각적 집중도를 자극했습니다. 궁금증을 유발케 했습니다. 저는 클릭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신경과학자들이 자유의지를 부정하기 위한 예로 우려먹듯 언급하는 결심하기 0.2초전에 움직이는 뇌 내 준비 전압’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 목록을 클릭해 버렸던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광고가 존재한다. 고로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위의 유약한 소리를 하거나, 혹은 의지의 박약함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뇌 내 준비 전압’을 이용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자발적 행위를 일으키는 과정이, 혹은 충동이 제가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일어난다고 해도, 여전히 저의 의식은 그 행위를 받아들일지 말지에 관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런 극단적인 예로 덮어버리기에는 자유의지와 의식은 지나치게 복잡합니다. 그럼에도 저 물건이 ‘관련 검색’ 이라는 이미지로 제게 인식되어 제 결정권에 영향을 줬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가 아니라,‘직접적으로 인식되지 않으면 충동 기제로 작동할 수 없다.’라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아이쇼핑을 싫어하는 이유이자(제가 남자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이 쇼핑으로 감정적 충족감을 느끼고 만족할 정도로 가상 소유에 대한 감정이입도가 높지 못합니다) , 사람들의 백일몽을 자극하여 균열에서 발생하는 공허의 틈을 메우기 위한 욕구충족의 매개인척 하기위해 이미지를 극단적으로 사용하는 포장지인 광고 이미지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배신스럽게도 알면서도 넘어가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비교적 우위에 대한 욕망은 득도하지 않으면 벗어나기 지난하기 때문일 겁니다. 득도(得道) 또한 비교적 우위의 욕망에 대한 모순에서 자유롭지 못하겠습니다만…….

소니는 커널 형을 벨런시드 아머쳐가 아닌, 다이내믹 드라이브로 가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매니아를 노린다는 건데 아마 제가 사용했던 EX90은 그런 과도기에 출현한 하프커널이 아니었나 생각되어 집니다. 그 실험의 집대성이 EX 700 인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EX 700을 만들고 나서, EX 90을 계량한 EX 500을 출시합니다.(EX85를 계량한 EX300도 출시됐습니다)

커널을 다이내믹 드라이버로 만든 것은 역시나 해상도를 조금 낮추더라도 공간감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일 겁니다. 그렇다고 그 공간감이 헤드폰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커널형의 소음 차단과 공간감을 동시에 잡겠다는 소니의 의지가 다이내믹 드라이브의 사용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실제로 이런 독특함이 아니라면 예전 영광을 되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어폰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겠죠.
EX 700은 너무 비싸서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고, EX 90의 진화 형이라 할 수 있는 EX 500을 구입하게 됐습니다. 과연 EX 90에서 얼마나 진보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가격차가 그리 크게 나지 않은 것도 한 몫 했습니다만, 역시나 이건 악취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도 이 악취미에 동참하는 많은 분들과 마찬가지로 소니 888로 이 악취미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처음 888로 음악을 들었을 때의 그 청량감이란 쉽게 잊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이어폰에 있어서는 소니에게 어떠한 기대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구차한 설명과 예는 될 수 있는 한 자제하며 감상을 적으려 하고 있습니다만, 무언가에 대한 설명에 적절한 공감을 이끌기 위해 비유적인 예를 적용하지 않을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언어를 통한 소통이란 여전히 가장 강력하고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지만....

예전에 EX 90에 대한 감상을 적을 때, ‘마법도 사용하는 검사’ 라는 예를 썼습니다. 여기서 마법은 섬세한 표현력, 검은 단단함과 강함의 상징입니다. 즉, ‘전체적 음색이나 고음부에 대한 표현력도 좋지만, 저음부 역시 단단하다. 단지, 오픈 다이내믹형 이어폰만큼 섬세하지는 않으며, 벨런시드 아머쳐타입의 정통 커널형에 비해서 중저음이 묵직하지 않다.’는 뜻이었습니다. 마법사만큼 마법을 잘 다루지는 못하고, 검사만큼 터프하지도 않아 꽤 어중간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당한 섬세함과 적당한 단단함을 선호하시는 분들이 무척 기꺼워할 이어폰이란 뜻이었죠. EX 500 역시도 ‘마법도 사용하는 검사’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EX90이 레벨 20의‘마법 전사’ 였다면 EX 500은 레벨 50의 ‘마검사’ 입니다.

다이내믹 드라이브를 사용하기에 5일간 에이징 파일을 사용하여 에이징했습니다. EX90과 비교하여 음의 선명함이 차이가 많이 납니다. 공간감은 더욱 좋아졌고, 저음부도 탄탄합니다. 그런데 처음 들었을 때 중저음이 꽤 약하단 느낌을 받게 됩니다. 고음은 선명하고, 저음은 통통 튀듯 울려 서로 잘 섞이지 않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듣고 보니 에이징이 잘 돼서 그런지 그런 거부감은 사라지더군요. 제 귀가 이 소리에 적응이 된 것인지, 에이징이 될수록 소리가 좋아지는 다이내믹 드라이브의 특징 때문인지 확실히 나누기는 미묘한 문제입니다.

EX90과 단순 비교하면 소리의 해상도와 공간감이 월등합니다. 쉬이 차이를 느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예를 들면 EX 90은 흰 색 실이 똘똘 뭉쳐져 있어 소리의 뭉침이 EX500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음색이라면, EX 500은 그 흰 실이 구 형태로 뭉쳐진 입체적인 거미줄과도 같아, 음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어도 그 사이에 입체적인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해야 할까요? 구 안에서의 통일성을 느낄 수 있으면서도 공기가 드나들 공간이 존재하기에 내부로 들어갈수록 그 하얀 선의 섬세함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음들이 보다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이런 EX 500에 큰 단점이 존재하는데 선이 너무 얇습니다. EX90보다도 선이 얇아서 단선의 위험도 높습니다. 가죽 케이스가 동봉되어 있는데, 케이스를 사용하는 일을 습관화하지 않으면 단선이 악몽이 되살아날 것 같아 염려됩니다.
이것만 제외하면 정말 괜찮은 이어폰입니다. 가격대비에서 바라봐도 훌륭한 이어폰입니다. 덕분에 EX90때 보다 호응도 좋고, 전체적인 평가도 좋은 것 같습니다. 특히 클래식과 재즈에서 상당히 음색이 좋습니다. 단, 소니는 이어폰 음색에 자잘한 맛을 내는 것을 좋아하기에 (혹은 그것을 자존심으로 알고 있기에) 소니 특유의 표현력을 원하지 않는 분들에겐 추천하지 않습니다. 저는 심심한 맛은 나지 않아서 무척 좋아합니다.



(패러디라면 패러디입니다;; 농담 반으로 쓴 글입니다.)



by 빗소리 | 2009/07/07 14:55 | 감상 | 트랙백 | 덧글(4)
마더


<내용 있습니다>


불편한 영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진정 대담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감히 건드릴 수 없다고 ‘여겨지는’ 일종의 성역인 모성애를 덧씌워 만들어진, 그리고는 그 모성애를 찢어 해부해버리는 이런 영화가 상영되고 200만 이상이 봤다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이 영화에서 모성애란 염색약 같은 것이죠. 영화 전체가 ‘존경해마지 않은 모성’이라는 단어로 물들어 버리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일종의 장막. 본질을 감추기 위한 거짓 눈속임으로 비춰집니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모성은 그 일반적 관념이 아닌, 자식을 향한 비정상적인 집착, 혹은 광기에 훨씬 가깝습니다. 자식은 어머니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요구품으로 전략 되어버립니다. 그 요구품이 정상 가도를 달려야만 어머니의 욕망은 보답 받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도준은 감옥이든, 아니든 별 상관없는 듯 지냅니다. 자신의 자식을 낙오자, 살인마, 정신병자로 여기고 싶지 않은 ‘믿음’이 도준 엄마의 강인함의 원천이자 그녀의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는 ‘모성애’라는 가면이 되어줍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에 하나의 양념이 더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농약 바카스’입니다 (마음이 약해서 다른 것을 먹였다고는 하지만요). 이것 덕분에 도준 엄마의 비정상적인 집착은 관객에게 합리화 됩니다. 사실 농약 바카스 없었어도 모성의 복잡한 욕망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조금 더 불편한 영화가 됐겠죠. 하지만, 자식을 살해하려 했다는 것에서 오는 도준 엄마의 죄책감, 그 일 이후 아이가 저능아가 됐다는 것에서 오는 후회, 이렇게 자신의 과오로 인해 무능해진 자식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현실에서 오는 책임감이 도준 엄마의 병적인 집착을 관객에게 ‘무리 없이’ 납득시키는 장치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도준의 비정상적 행동과 함께 이야기를 이끄는 실마리가 되죠. 또한 정상으로 자라지 않아 독립되어 다른 여자를 갈망하기 힘든 도준과 도준 엄마가 저질스런 농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봉준호 감독의 작품은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이렇게 세 편만 보았습니다. 그리고 세 편 모두 사건의 중심인 어떤 ‘상징’이 나오죠. 풀어내야 하는 과제이자, 힘없는 자들이 힘 있는 자들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들춰내는 매개. 괴물에선 말 그대로 현실에 구현화된 ‘괴물’로 존재하는 그것. 살인의 추억에서는 그 상징이 존재하지만 끝내 밝혀지지 않은 실루엣으로, 마치 강림한 악마처럼 실재와 형이상학을 오갑니다. 마더에서는 그 상징이 말 그대로 상징으로서만 존재합니다. 아들의 선함을 주장하고 증명하기 위한, 마치 기독교의 사탄 이미지와도 같은 필요악이죠. 그 필요악의 구상이 절대선에 대한 찬양을 위한 것임은 물론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절제와 금욕으로 인해 뒤틀려진 욕망의 필연적인 발현이라 치면(사탄 외치면 많이도 쳐죽였죠), 마더에서 그 상징의 뿌리는 모성애에 있습니다. 성스러움의 상징이 악의 근원이라는 모순에 닿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발아한 악의 상징은 모성의 뒤틀린 욕망을 고발합니다.
고물상 할아버지를 쳐 죽일 때 도준 엄마가 분출하던 감정은 자식을 살리겠다는 모성애 보다는, 자신의 성역을 더럽힌 대상에 대한 단죄에 더 가깝습니다. (모성은 성스럽고, 때문에 모성애를 통해 밝히고자 하는 자식의 결백 역시 성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의 거친 말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살인에 대한 자각은 뒤늦게 찾아오죠. 자식의 순수를 지키기 위해서보다도,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손을 더럽힙니다. 자신의 욕구를 위해 아들을 살인마로도, 정신병자로도 인정할 수 없었던 도준 엄마는 결국 사건을 파헤친 끝에 자신의 아들이 정신병자이자 살인마라는 사실에 봉착하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도준 엄마를 도와주는 사람은 친한 사진사 여성과, 백수 양아치 친구인 진태입니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건 진태뿐이죠. 물론 그것도 돈을 받고 도와주는 것이지만.
이미 결정 난 사안에 대해서 도준 엄마의 편은 없습니다. 이 부분은 영화 괴물과도 겹쳐집니다. 사회와 공권력은 이 세상에서 약자의 편이 아니라는 음울한 암시, 혹은 그 시린 현실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상당히 적나라하게 표출됩니다. 대충 대충 넘기는 경찰 수사에 어머니가 분노를 느낄 수도 있었겠죠. 이야기의 막바지까지 도준 엄마와 아들은 그러한 사회의 약자이자 희생자입니다. 그런데 사실 쌀떡소녀와 종팔이야 말로 그들보다 더한 약자, 혹은 진짜 희생자입니다.
여기서 아들과 엄마는 가해자가 됩니다. 아들은 쌀떡소녀를 죽였고, 어머니는 그 사실을 은폐해 종팔을 감옥에 넣어버리죠. 때문에 마더는 괴물보다 훨씬 복잡한 이야기가 됩니다. 결백한 종팔은 자신을 위해 발 벗고 뛰어주는 엄마가 없어서 결백을 밝히기는커녕 하다못해 다른 사람에게 누명을 씌울 수도 없습니다. 종팔 앞에서 도준 엄마와 도준은 절대적인 가해자, 바로 악 그 자체입니다. 이렇게 모성의 하얀 가면은 해체됩니다.

아정은 사회에서 버림받은 존재입니다. 그녀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지옥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삶의 비참함 속에서 - 어쩌면 살아가기 위해서 - 어떠한 권력을 획득합니다. 핸드폰 사진의 현상을 물어보는 그녀에게, 이 사진들은 그녀가 비참한 삶을 영위해 나가는 부조리의 증거이자 일종의 컬렉션이 됩니다. 이 ‘굉장한’ 컬렉션은 그녀가 약자의 입장에서 더러운 세상을 까발릴 수도 있는 무기이자, 혹은 까발리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녀의 정신적 지지대가 되어 주는 듯 보입니다. 원조교제는 불법이고, 그들에게서 쌀을 받는 그녀이지만 사진이 찍힌 이상 그 남자들은 아정에게 약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남자가 싫고, 더럽고, 이 세상이 증오스럽지만 그 사진들을 지우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그 지옥 속에서 그녀가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유희 일지도 모릅니다. 사건의 중심에 자리 잡은 그녀의 핸드폰이 쌀독 속에 감춰져 있던 것은 직접적이면서도 적절한 표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식이 살인을 해버린 이상 도준 엄마도 사회에서 버림받은 존재입니다. 자식을 정상적으로 기르지 못했다는 현실에서 주위 사람들의 무시와 폭력은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그녀를 따라다닙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식의 결백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종국에 그녀와 그녀의 모성은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지만 그녀에게도 구원은 있습니다.
그녀의 ‘침’은 괴로운 현실에서 도피시켜주는 장치로서 작동합니다. 후에 그것은 그녀의 살인의 결정적 물증이 될 수도 있게 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도준이 찾아 돌려줌으로서 그녀의 죄는 묻혀버리고, 그녀는 그 침을 사용해 다시금 괴로운 모든 것들을 날려버립니다. ‘Once Upon A Time In America'에서 누들스의 대마초와 겹쳐지는 이 장치는 역광에 휩싸인 그녀의 실루엣에 대한 표현으로 그 차이를 나타내는데, 아줌마들이 서서 미친 듯 흔들어대는 관광버스와 겹쳐지며 강렬한 여운을 남깁니다. 

정말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네요. 감탄하면서 봤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침을 맞고, 그녀의 한약을 먹은 여성은 과연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요?
혹은, 정상적인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요?
회의적입니다. 도준 엄마가 그런 것을 용납할 것이라 생각되진 않네요.



by 빗소리 | 2009/06/13 19:01 | 감상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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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월군//오랜만이야 :) ..
by 빗소리 at 07/04
전 하도 무심해서 그런지..
by 말랑 at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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